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후일담 == 9월 8일 콘라트 3세는 살로니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떠나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마누엘 1세와 가까워진 그는 루지에로 2세가 통치하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를 공격할 계획을 짰다. 한편 [[루이 7세]]는 1149년 [[부활절]]까지 성지에서 머물렀다. 혹시라도 성지에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찾은 것이다. 거기에 엘레오노르는 이혼하겠다고 외치고 있었고 루이 7세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느라 고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정도 실패하고 아내까지 잃은 [[루이 7세]]는 "이게 다 동로마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동로마에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후에 막내딸 아녜스를 동로마에 시집보냈다. 문제는 아녜스와 결혼한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는 얼마안가 5촌 아저씨 [[안드로니코스 1세|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는데다가, 이 아저씨가 후임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녜스까지 강제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안드로니코스는 젊었을 적 유부녀, 근친을 가리지 않는 희대의 난봉꾼이었는데, 뭐 그건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이때는 이미 60대 중반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남편의 살해자이자 새신랑인 할아버지 황제(...) 역시 얼마안가 쿠데타로 처참하게 처형당하고 일족이 몰락했으나, 아녜스는 무사히 살아남아 후에 비잔틴 귀족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한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s-2.1]]는 십자군의 대실패에 굉장한 충격을 받고 고뇌에 들어갔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이 유럽에 승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유럽의 죄를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